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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1989~1993)'
'목사', '저술가', '긍정적 사고'의 창시자,
'자기 계발' 동기부여가 등 수없이 많은 호칭을 가진 그는 
세계적인 동기부여 연설가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중년의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실의에 빠진 듯 힘이 다 빠져 있는 그는 말했습니다.
"전 평생 열심히 일했지만, 사업이 부도나면서
제 인생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중년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물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셨다고요? 그럼 부인은 있습니까?"
"네,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뒷바라지해 준 아내가 있습니다."
그는 종이에 '훌륭한 아내'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중년 남자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자녀들은 있습니까?"
"네, 저만 보면 함박웃음을 짓는 착하고 귀여운 세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종이에 '착하고 귀여운 세 아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중년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소중한 친구는 있습니까?"
"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의좋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는 종이에 '좋은 친구들'이라고 적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년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건강은 어떤가요?"
"건강은 자신 있습니다. 아주 좋은 편입니다."
그가 이번에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으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중년 남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제게는 아직 귀한 것들이 남아 있었네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진 것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
실패한 인생이란 생각이 들 때,
아무런 의욕이 없을 때,
불평불만만 쌓여 갈 때,
종이 한 장 꺼내 놓고, 차분히 써 내려 가세요.

소중한 사람들,
일상 속 작은 성공의 경험들,
좋았던 일,
그렇게 하나둘 적어 내려가다 보면 보일 것입니다.
내 삶에 남아있는 희망의 불씨가..


# 오늘의 명언
희망은 좋은 소식이 나쁜 소식보다 우세한지 계산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희망이란 그저 행동하겠다는 선택이다.
- 안나 라페 -

 

 

그들이라고 두렵지 않을까요.
치솟는 불길, 생사를 오가는 재난 현장
하지만 목숨 건 사투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찢어진 소방장갑을 사비로 사서 써야 하는 근로 여건과
참혹한 순간을 마주한 뒤 찾아오는 정신적 트라우마

소방관 처우 개선을 향한 전 국민 한마음 모으기
소방관 GO 챌린지 캠페인에 동참해 주세요.

소방관과 그 가족을 위해 재충전의 시간을 준비했답니다.
이번 캠페인은 여행업계의 따뜻한 하루라 불릴 만큼 
선한 일에 앞장서 온 여행박사가 나섰습니다. 

그분들의 노고에 비하면 그 어떤 보답이라도 작을 수밖에 없지만, 
참혹했던 현장의 기억을 잊을 만큼 따뜻하고 즐거운, 
나쁜 기억을 덮을 만큼 행복한 기억을 
다시 심어드리기로 싶습니다.

따뜻한 하루 홈페이지를 통해 자세하게 신청서를 작성해주세요.
여행박사와 따뜻한 하루가 신중하게 검토하겠습니다. 
그리고 선정된 소방관 외 동반 한 분까지 2박 3일
전액 무료로 해외여행을 보내드립니다. 

대한민국 소방관 여러분 힘내세요.
우리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올해 1월 심각한 화상 치료를 위해 머나먼 땅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온 예세가 치료를 마치고 돌아갑니다.
그 어떤 치료보다 힘들고 아픈 화상 치료를 견뎌낸 
예세의 얼굴에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행복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화상 치료는 어른도 참아내기 힘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화상 입은 피부를 부풀려 제거하고 다른 피부를 이식,
진통제를 처방하여 치료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기에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염증이 가라앉지 않아 수술 일정이 지연되는 등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그 결과, 예세가 찾은 것은 새로운 피부와
없어졌던 귓불만이 아니었습니다.

화상으로 인해 영영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웃음'과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던 '미래'를 찾았습니다.
어린 예세에게 대한민국이 이제 낯선 땅이 아닌,
희망의 땅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시 만난 예세는 처음 만났던 모습과 사뭇 달라져 있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는 치킨을 사서 갔는데
어찌나 맛있게 잘 먹던지 먹는 모습만 봐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예세 정말 예뻐졌네요."라고 하니
예세가 한국말을 알아듣고는 배시시 웃음을 짓습니다.
한국생활 4개월 만에 이룬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탄자니아로 돌아간 후에도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는 예세를 위해
동화책 세트와 교재를 선물로 함께 전달했습니다.
먼 훗날 탄자니아에서 한국말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길 소망해봅니다.

환한 표정으로 예세가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따뜻한 하루 가족 여러분이 후원과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따뜻한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1960년대 중반 프랑스 남부 아를 지방.
이곳에 살던 잔느 칼망 할머니에게 어떤 변호사가 제안합니다.
할머니가 살던 아파트를 변호사가 사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매매조건이 좀 특별했습니다.
잔느 칼망 할머니가 살아계신 동안 매달 2,500프랑을 지급하고,
그녀가 사망한 후에 소유권을 넘겨받기로 한 것입니다.

계약조건은 두 사람 모두를 만족하게 했습니다.
별다른 소득이 없던 90세의 잔느 칼망 할머니 입장에서는
자신의 집에 살며 죽는 순간까지 매달 일정한 수입이 생겼으며,
변호사도 갑자기 큰 목돈을 들이지 않고서도
집주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변호사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1년, 2년, 10년, 20년, 30년...
1995년 변호사가 77세에 사망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잔느 칼망은 여전히 살아 계셨습니다.

변호사는 무려 30년 동안 매달 약속한 금액을 꼬박꼬박 지급했지만,
죽는 순간까지 집주인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계약은 변호사가 죽은 다음 가족들이 승계받았습니다.
그때까지 낸 돈이 집값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변호사가 사망한 다음에도 잔느 칼망 할머니는 2년을 더 사셨습니다.
그리고 1997년 8월 4일 12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세계 최장수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습니다.



살면서 하는 수많은 예측은 불확실성을 동반합니다.
정확한 예측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깁니다.

하지만 순간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예측보다
함께 win-win 하는 결과로 함께 진행한다면
빗나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는 것은 밤중에 시골길을 
전조등도 켜지 않고 달리면서 뒷 창문으로 
밖을 보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 피터 드럭커 -

 

 

조선의 명문가에서 여섯 명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작은아버지는 영의정,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명문가 
이항복의 후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엄청난 경제력을 지녔던 집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은 개항과 문명의 충격이 거세던 변화의 시대였습니다.
제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노골적으로 한반도를 넘보고 있었습니다.

'조국을 되찾는 것은 대한민족으로 해야 할 도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명문가의 집안으로서 일본의 치하에서 생명을 
연명한다는 것은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나라가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로 강제 편입되자 
형제는 독립운동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국내에서 하는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낀 형제들은 
대대로 내려온 집과 땅을 포함한 엄청난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마음 하나로 
만주로 망명한 형제는 좀 더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김좌진, 홍범도 장군의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1920년 폐교될 때까지 3,500여 명의 독립군을 키워낸 
바로 신흥무관학교입니다.

 

 

 

 

1945년 11월 5일 중국 상하이 공항에 모여있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 
오른편에 홀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자 쓴 노인이 
다섯째 이시영 선생님입니다.


첫째 이건영(李健榮, 1853~1940)
중국의 상해에서 88세의 노령에도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둘째 이석영(李石榮, 1855~1934)
가장 많은 독립자금을 보냈지만, 상하이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 아사하셨습니다.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병사했습니다.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자식들을 양육할 수 없어 보육원에 맡기고,
본인은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때울 만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독립운동을 하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의해 중국의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다섯째 이시영(李始榮, 1869~1953)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직을 맡았으며 
조국에 돌아와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이어 신흥대학을 설립했고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하셨습니다.

여섯째 이호영(李頀榮, 1875~1933)
밀정을 처단하는 다물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1933년 베이징에서 가족들과 함께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여섯 형제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나라를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는 대한민국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모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이다.
- 우당 이회영 -

 

중국 송나라 학자였던 사마광의 어릴 적 이야기입니다.
한 아이가 커다란 항아리에 빠져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다급한 비명을 들은 동네 어른들이 
항아리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사다리 가져와라, 밧줄 가져와라, 요란 법석만 떨었습니다.
그동안 물독에 빠진 아이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사마광이 옆에 있던 돌멩이를 주워들고
커다란 항아리를 깨트려 버렸더니, 물이 흘러나와 
아이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면서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에 대한 순서가 바뀌곤 합니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중요함의 순서가
바뀌지 않는 무엇인가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돈이 생명보다 중요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 오늘의 명언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행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 괴테 -